안토니오 그람시와 변형된 마르크스주의의 한계 독후감

안토니오 그람시(이탈리아어: Antonio Gramsci1891년 1월 22일 ~ 1937년4월 27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지식인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한 때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라고 한국어 위키백과에 적혀있다. 이 서술은 대체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전에 우선 필자는 그람시의 저작을 읽지 않았으며, 이 글은 칼 보그의 "다시 그람시에게로"를 비롯한 2차 저작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둔다.

그람시는 마르크스 사후, 소위 '정통'으로 지칭되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며 등장한 인물이다. 그람시의 성향은 그의 격동적인 삶의 여정을 따라 여러차례 변화를 겪는데, 칼 보그는 이러한 변화중에도 변하지 않은 그람시 사상의 본질로써 기계적 유물론에 대한 반발과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꼽았다. 

보그에 따르면 이러한 소위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등장은 마르크스 사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즉,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의 서유럽 노동자 운동들이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회민주주의 운동으로 개량되는 등 기존의 사회에 통합되는 움직임을 보인것에 기인한다. 이들은 이러한 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사회변혁에 대한 실천적인 이론을 전개하기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마르크시즘 역사 모델의 기계적, '과학적' 완성에 치중하였다. 이들은 혁명에 대해 숙명적인 것으로써, 봉건제 사회의 극단에서 일어난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혁명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가 극단에 다다른 언젠가의 시점에 일어나는 것이라 보았다. 

거시적인 관점은 이들을 더욱 더 유물론에 치중하게 하였다. 이들은 상부구조의 역학관계를 거의 완전히 무시하였고, 실제 역사의 인과를 추적하기 보다는 이를 마르크스적 해석에 대입하는데 급급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훈고학적 연구태도를 불러오게 된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사회과학의 연구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의 연구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뿌리-노동의 절대가치설-를 두고 있는 고전적 경제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유연성을 강조했던 베버의 다원주의 이론이 끊임없는 실증적 분석의 축적과 이를 통한 수정으로 발전해 나갔던데 비해 경직되고 내적 정합성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그 시대적 배경에 의해 좌절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태도에 기인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한다.

그람시는 이러한 '과학적'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기계적 유물론의 역사인식에 반발하여 당대 유럽사회에대한 실증적인 분석-현대의 계량적인 분석은 아니다-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람시에 따르면 역사는 기계적, 숙명적 이론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며, 거시적인 관점에서 관찰하였을 때 그것이 지니는 유물론적 발전성향은 귀납적으로 이해되어야하지 그것이 절대적이고 연역적인 모델로써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람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하부구조의 우월성은 인정하면서도 모든 특정 시점에 그것이 상부구조에 비해 우월한 것은 아니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람시에게 혁명은 생산수단의 발전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당대의 인간들의 의지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혁명에 있어서 정치와 상부구조의 역할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람시의 정치, 상부구조에 대한 강조는 헤게모니 이론을 탄생시키는데 이것이야 말로 그람시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는 헤겔의 유심론적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이데올로기가 상위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는 도구로써 활용됨을 주장하였다. 그람시는 상위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는 수단을 지배와 지도로 나누었는데 지배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념의 생산수단과 관련된 물질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도란 상위계급이 사회의 규범적, 일상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함으로써 하위계급에 대한 사상적 통제를 가한다는 뜻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자체가 자본주의적 물질토대위에 건립되어있기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은 좋건 싫건 간에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규범적으로,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현대사회에서 성실과 신용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 혁명 이전의 가톨릭 사회에는 이러한 것들이 덕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 이렇나 덕목들에 대한 규범적인 정의마저도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에게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학자들에게는 패러다임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여지고 내면화된다. 대중들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체제를 지탱하며, 학자들은 내면화된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헤게모니를 체계화 시키고 더욱 강화시킨다. 학문적 헤게모니 이론은 후대의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매우 흡사한 측면이 있다. 쿤의 정상과학 이론이 지극히 비정상과학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유사성을 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헤게모니 이론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좌절시켰던 노동자운동의 사회민주주의적 변형을 잘-지극히 마르크스적인 방법으로-설명할수 있게 해주었다.노동자운동은 물리적 억압의 타파에는 성공하였을지라도 그들 내면에 자리잡은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람시는 이러한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항 헤게모니 이론을 제시한다. 이는 레닌주의와 매우 흡사한 면이 있는데, 대중들이나 체제 부역적인 학자들은 내면화된 헤게모니를 제대로 파악,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하는 헤게모니를 만들어야 하며,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가 하부구조의 모순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로 인해 침식될 때를 노려 대항 헤게모니를 통한 사회변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사회변혁과 계급관계에 대한 집착만 제외한다면 현대 주류 비교정치학의 상징주의 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중립적인 분석틀로써 제시된 상징주의 이론과는 달리 헤게모니 이론은 사회변혁을 위한 규범적인 대이론이다. 그람시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선 시야와 착상을 가지고 뛰어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써 유연한 시각을 가지고 실증적 분석을 추구한 당대 보기드문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출발점이 마르크스이론이었기 때문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연역적 대이론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물론 그의 분석이 마르크스주의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었을 면도 있을 것임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한계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람시가 주장한 것은 새로운 발전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철학적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읽은 책의 이름도 "다시 그람시에게로"이다. 앞서 언급했던 고전 경제 자유주의나 다원주의에 있어 아담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막스 베버의 저작들은 각자의 분야에 있어 고전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저작이 끼친 공헌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후대에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그것들을 바탕으로 발전된 후대 이론에 의해 논박과 부정의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발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는 마르크스 저작의 모호성과 규범적인 성격(실제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규범적이냐 아니냐는데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의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행태를 보건데 답이 상당히 명확하다고 생각된다.), 외적 설명력의 부족-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인해 연구자들이 그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고 사상적으로 변절(!)하거나 아니면 뻑하면 원전으로 되돌아가자느니 하는 훈고적인 행태를 보이게 되었다. 그람시는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며 등장하였지만 웃기게도 그 역시 주장한 것은 '제대로 된'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을 제외하고는(현대 정치사상, 정치철학 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나름대로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의 이론으로써 정합성은 차지하고서라도.) 제대로 된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주류경제학으로부터 말 그대로 비웃음 거리취급을 당하고 있고, 국제정치학이나 비교정치학에 있어서도 대안이론이나 '원전'으로써의 가치 이상은 없는 실정이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고전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자라면 한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가치는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이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읽는 도구적 가치이지, 오늘날의 현실을 마르크스로 설명하려는 이론적인 가치가 아니다. 경제학에서 아담 스미스와 국제정치학에서 케네스월츠(50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는 단지 고전적인 인용에 그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일군의 무리들이 아직도 있는 듯하다. 

덧글

  • 산마로 2015/03/27 10:00 # 삭제 답글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니까요. 어쨌든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고전'을 꼭 읽어야 할 의무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프린키피아나 종의 기원을 읽어야 할 의무가 없는데 사회과학은 다를 이유가 없고, 고전을 읽으라는 사람들은 대개 과학과 종교를 착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죠. 정치철학,정치사상의 분야에서라면 '고전'의 의미가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과학도가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는 그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남는다면 몰라도 말이죠.
  • serviceindeed 2015/03/27 14:34 #

    경제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읽을 필요가 없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학이나 특히 정치학을 한다면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는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마르크스 책을 한권쯤은 읽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사회학도 주류 계량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크게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정치학을 공부한다면 충분히 한번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되도 도움이 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원전을 읽은 것과 읽지않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죠.

    제가 주로 다루는 분야인 국제정치학의 경우에도 후대의 저작만 읽어도 신현실주의가 무엇인지 대충 감은 잡힙니다만 그래도 케네스 월츠나 에드워드 핼릿 카, 조지케넌의 책은 읽어주는게 좋죠. 카나 케넌의 책은 역사적 사료로써의 가치도 있고,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학부이상에서는 권장사항이라는 것이죠. 물론 가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껄이듯이 자본론을 읽어보고 마르크스를 까라 이런 소리는 아닙니다. 읽어본 사람이 이해가 더 잘 될 것이며 이러한 부분이 유용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죠.
  • 산마로 2015/03/27 21:23 # 삭제

    님이 말씀하신 분야에서 도움은 될 것입니다만, 과연 그 독서가 다른 공부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지는 여전히 의문이 듭니다. 전공분야에서 나오는 책과 논문들 중 나름 주목받았다는 것들만 읽기에도 벅찰 정도로 현대는 출판물이 많습니다. 게다가 좁은 전공분야에 갇히지 않으려면 타 분야의 최신 동향 정도는 파악해 두는 편이 좋은데 자기 분야의 고전 읽기보다 도리어 그런 최신 연구성과들을 폭넓게 섭렵하는 편이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시간을 투자했을 때 고전 원전을 읽어서 얻는 것보다 현대 논문과 타 분야의 최근 소개서를 읽어서 얻는 것이 더 가치 있었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몰라도 된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단지 방대한 원전을 폭넓게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serviceindeed 2015/03/28 01:38 #

    저도 동의합니다 읽어볼 가치는 있지만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죠.그냥 읽으면 안 읽은 거 보다야 좋다는 겁니다.

    음 이걸 표현해보자면 대학원을 가고자하는 학부생들에게 교수님이 방학에 읽으라고 추천해주시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 零丁洋 2015/03/28 23:26 # 답글

    자본주의 작동 시스템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밝혀 낸 사람이 맑스 말고 더 있나요? 지금의 경제학이란 자본주의를 연명시키려는 사술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그람시가 맑스로 되돌감이란 그의 논리에 교조적으로 따르자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비판적 태도를 모범으로 삼자는 뜻이 아닌가요?
  • serviceindeed 2015/03/31 23:12 #

    마르크스가 어떠한 일반적인 논리를 도출해내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마르크스의 이론이 연역적인 이론이라고 해서 그것이 완벽하게 외적 설명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마르크스의 이론은 당대에 외적 설명력의 부족과 검증불가능성으로 비판받았습니다. 막스베버가 자본주의정신 그 자체도 유물론으로는 설명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혹시 마르크스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원리를 밝혀내었는지 설명해주실수 있다면 감사합니다.

    지금의 경제학이 자본주의를 연명시키려는 사술에 불과한 것은 제가 판단할 바가 아니나 이미 정상과학의 궤도에 오르고 수많은 연구결과를 축적한 주류 학문을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러한 말로 비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근거를 들어 주실 수 있다면 고맙겠습니다.

    그람시가 분명히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비판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근거가 마르크스의 정신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리학자들이 물리모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뉴턴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하던가요? 아니면 프린키피아를 읽자고 하던가요. 비판적인 정신을 요구했다면 왜 하필 마르크스의 비판정신을 요구한 것일까요?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비판정신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 자원봉사자 2015/04/03 15:17 # 삭제

    이 사람은 뉴비밸의 아이돌로 불리는 자로서 이 사람과는 그 어떠한 생산적인 논의가 불가능하며 이를 상대하는 수많은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증발시킨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취급에 주의를 요합니다.
  • 零丁洋 2015/04/04 21:41 #

    serviceindeed/ 맑스의 논리는 개인의 순수한 관념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고 고전경제학자의 주장과 당시 경제 관련한 자료와 자본가, 노동자의 주장과 경제적 지식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헤겔이 순수 사변에 의존했다면 맑스는 경제 현실 부터 오는 다양한 경험적 자료에 기초하여 논리를 세우고 나름의 실천적 운동을 통해 논리의 타당성을 확인합니다. 맑스의 주장이 미세한 실천 부분에서 다소 맞지 않은 부분이 있을지 모르나 자본주의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만남에 기초하여 자본증식을 위해 작동한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입니다. 자본의 증식은 노동자의 잉여 노동에 의하며 이는 결국 과잉 생산을 유발하고 끝없는 시장 확대와 자원소모로 이어지며 그게 멈추는 순간이 경제 공황입니다. 지금의 경제학은 여기에 무엇을 더하나요? 케네디라운드, 우루과이라운드... 경제학자와 경제관료는 무엇을 하나요? 맑스가 예측하고 현실로 나타난 대공황과 같은 파국을 제어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이런 행위는 이미 맑스가 자본주의 경제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술이라는 표현은 다소 수사적으로 말한 것이고 지금의 경제학자는 무엇을 연구하고 경제전문가는 무엇을 하나요? 더 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아마 월가가 세상을 계속 지배하는 방안을 연구하겠죠?^^

    중국, 일본, 한국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하지 않는 국가입니다. 그렇게 검소하고 근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확장되어 들어 온 후 너무 근면해져 걱정일 지경입니다. 이는 현실이 정신을 규정한 것이지 정신이 현실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맑스의 논리가 베버의 주장 보다 옳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렇게 규정된 정신은 다시 현실에 작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겠죠.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나름의 과학이라면 맑스의 정치사상은 과학이 아닙니다. 맑스의 비판정신과 뉴턴의 정신과는 동일해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뉴턴과 같은 이상한 태도를 갖을 필요가 없습니다. 과학은 태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 논리와 검증된 결과만 유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실천에서 모범적 태도는 끝임없이 상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 serviceindeed 2015/04/05 13:20 #

    마르크스가 나름의 실천적 운동을 통해 논리의 타당성을 확보하셨다고 하는데 나름의 실천적 운동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노동의 절대가치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노동의 절대가치설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철학적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노동의 목적이 자아실현이라고 누가 과학적으로 증명했나요?

    시대의 한계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야 말로 오늘날의 현실에서 마르크스가 아무런 설명력을 가질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마르크스는 한계효용을 알지못했고 따라서 경영의 가치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을 한계효용 개념 없이 이해할 수 있나요? 마르크스 경제학은 죽은 경제학입니다. 그것이 노동가치설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더이상 발전할 곳이 없어요.

    네 경제관료들은 대공황과 같은 파국을 제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공황을 막는 것이 자본주의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의 직장과 가정이 달려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은 당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에 근거한 계급관계였지 시장경제가 아닙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경제를 토대로한 정치적 구조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베버를 비롯한 다원주의자들 중 누구도 상부구조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발현이 일으킨 자본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이것이 하부구조를 변화시키게 되면, 이것은 또다시 상부구조에 영향을 끼치게한다고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길가는 철학박사, 정치학박사 아무나 잡고 물어보십시오. 마르크스가 베버에 비해서 우월한지. 베버의 저작은 마르크스보다 후대에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베버는 마르크스의 하부구조 토대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부구조만이 절대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반대한 것입니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예는 베버가 제시한 상호작용론의 예에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론대로라면 서구 자본주의를 완전하게 받아들인 동아시아의 상부구조는 서구의 것과 아주 유사해야할 것입니다.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이 발전해온 역사와 그 속에서 발전시켜온 사상이 서구의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호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겠지요 라고 쓰신부분이 바로 베버의 주장인데 베버의 저작을 제대로 탐독하신것 같지는 않군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어떻게 과학이라고 칭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군요. 그것에 나름의 실증과 논리가 있다고해서 그것이 과학이라고 불릴수 있는지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고대 야금술도 나름의 논리와 실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도 이것들을 과학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증과 논리의 근거들이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 없거나 혹은 아예 잘못된 가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아예 잘못된 가설입니다. 노동의 목적이 자아실현이며, 단위당 노동은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한계효용에 의해 완벽하게 반박되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의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산물과 해산물의 수요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고 해산물이 적게 생산되는 사회에서 농민의 노동과 어부의 노동의 가치가 똑같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零丁洋 2015/04/07 23:22 #

    serviceindeed/ 경제 현실에서 실천과 검증은 자신이 모두 직접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주체들의 실천이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해 줍니다. 맑스가 노동을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는 핵심 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하나 절대적이라는 표현은 맑스의 태도와 너무 어울리지 않군요. 물론 노동이 가설로 부터 시작했겠죠. 그러나 유용한 해석을 만들어 냈다면 가설을 넘어 유의미한 용어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거 말고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용어나 논리가 있나요? 노동이 자연과와 신진대사나 가치 창조 행위라면 모를까 자아실현이라는 표현은 너무 헤겔적이군요.

    베버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영향력을 강조하려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로 다소 경직되고 전투적인 맑스의 논리를 유연하게 변형한 점도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더 논리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의 증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상아탑 안에서 창 넘어로 보는 세계와 전투적 현장에서 뜨겁게 호흡하는 세계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맑스 논리의 전형을 따르지 않나요? 양적 성장은 질적 발전을 결정한다. 정치적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를 반영한다. 등등 차이라면 서구와 달리 일부 엘리트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어부의 생산과 농부의 생산이 같다? 맑스는 분명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물고기의 가치와 밀의 가치는 절대 다릅니다. 다만 이것이 식량으로 시장에서 교환될 때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같다 라는 말했습니다.
  • serviceindeed 2015/04/08 22:03 #

    1. 마르크스의 저작을 조금 더 읽으시길 바랍니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노동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절대적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희소성개념에 바탕을 둔 가치의 측정과는 반대로 어떠한 노동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한 증거가 있나요?

    2. 논리적 우월성이 아닌 선형적으로 발전된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를 바탕으로 발전된 것이 마르크스의 저작보다 발전된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것이 학문의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원전을 바탕으로 새로 업데이트된 모델이 있는데 굳이 원전으로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나요? 상아탑과 실제세계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말이야 말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씀이로군요.

    3.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마르크스의 이론에 부합한다는 것은 영정양님만의 의견입니다. 근거를 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베버가 주장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정신의 기원이 프로테스탄티즘에 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사례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양식의 외생적인 도입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은 선형적인 마르크스적 발전모델을 거친것이 아니라 분절적으로 외생적으로 자본주의 모델을 도입하여 이룩된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하부구조적 발전은 외부로부터의 상부구조의 계속된 유입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즉 경제발전이 사람들의 의식의 전환을 추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제발전은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자생적이고 선형적인 발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외생적이고 분절적인 이론과 모델의 유입에 그 토대를 둔 것이라는 뜻입니다.

    4. 밀과 물고기의 가치가 시장에서의 교환가치가 아닌 절대적인 척도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 허상이라는 뜻입니다. 경제학으로 측정될 수 있는 물목의 가치는 그것의 사용가치가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이고, 그것은 한계효용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사용가치나 절대적인 가치를 측정하려고 하신다면 철학에 답을 호소하시는게 옳겠지요.
  • 零丁洋 2015/04/11 01:41 #

    serviceindeed/ 지금 자본론을 읽고 있는 중이란 님의 주장이 정말 고맙게 느껴집니다.^^

    1, 4는 유사한 주제로 보이는군요. 효용이야 말로 주관적이고 철학적이군요? 변화의 순간을 미시적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으나 지속적이고 평균적으로 본다면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희소성? 맑스는 모든 가치가 화폐로 환원 되듯이 부 즉 가치 생산의 원천을 노동이 아닌 노동시간으로 환원합니다. 숙련과 미숙련, 생산물이 교환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를 포함하여 노동시간 만큼 개량적으로 자본의 증식을 파악하여 자본주의의 작동을 설명할 수 있는 용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2.과학이 누적적인 것은 과학의 속성입니다. 맑스의 사상 중 경제학은 핵심 사항은 밝혀졌다 해도 그 이후 분명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맑스 당시와 달리 변한 것도 많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연과학과 달리 이념에 오염되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맑스가 노동자의 논리를 대변하고자 한 것처럼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본을 위해 일을 합니다. 자신의 계급을 넘어 노동자의 삶은 바라본 맑스가 자신의 호구를 위해 자본에 봉사하는 지금의 경제학자들 보다 더 객관적이고 투명한 시야를 갖고 있었다고 봅니다. 맑스의 정신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3. 비서방 국가 중 자연스럽게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상부구조가 유입되어도 이식할 토대가 없는데 어떻게 가능한가요? 대부분은 일부 엘리트에 의한 무자비한 물적 토대의 확보가 근대화의 성공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민주화 후 산업화 보다는 산업화 후 민주화가 따르는 것을 보면 분명하지 않나요?
  • serviceindeed 2015/04/20 04:16 #

    자본론을 읽고있지 않습니다. 글을 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답변은 없을 것입니다.

    1. 말 그대로 동어반복이군요. 한계효용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의 경제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르크스 주의는 노동의 절대가치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즉, 노동생산성이 아닌 노동비용에 근거하여 경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경제학개론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2. 마르크스의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실증가능성이나 효용성, 이론으로서 완결성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저는 정치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나름의 분야를 확보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논리실증적 분석이 필요한 오늘날의 사회과학의 제 분야에서 실증될 수 없는 이론은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3.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근대화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유입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유럽국가, 그 중에서도 서유럽의 강대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형성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보편적이라면 이는 유럽중심의 역사관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연역적인 대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증적 분석에 있어 절대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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